
지수 투자자라도 퇴직연금을 방치해두면 방치적립금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디폴트옵션은 투자성향에 따라 상품을 갈라 자동으로 운용해주지만, 지정 이후의 사후점검까지 챙겨야 비로소 제도의 취지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
디폴트옵션이 막아주는 방치적립금
디폴트옵션, 정식 명칭으로 사전지정운용제도는 DC형(확정기여형) 퇴직연금과 IRP(개인형 퇴직연금) 가입자가 운용지시를 내리지 않고 방치할 경우를 대비한 제도다. 만기 도래를 통보받은 뒤에도 일정 기간 동안 별도의 운용지시가 없으면, 가입자가 미리 지정해 둔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적립금이 자동으로 매수된다. 2022년 7월 도입되어 1년의 유예 기간을 거친 뒤 2023년 7월 12일부터 본격 시행되었고, 확정급여형(DB형)은 이 제도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 제도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방치적립금 문제가 있다. 퇴직연금 계좌에 돈을 넣어두고도 별도의 운용지시를 하지 않아, 수년째 이자나 수익이 거의 붙지 않는 상태로 잠들어 있는 적립금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료: 고용노동부·금융감독원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 시행 관련 공시 자료 종합
실제로 제도가 자리를 잡으며 규모도 빠르게 커졌다. 2025년 말 기준 디폴트옵션 적립금은 약 53조 3천억 원, 지정 가입자 수는 734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되었다. 다만 그동안 공시된 자료를 보면 가입자 다수가 가장 낮은 위험 등급인 초저위험(현재의 안정형) 상품을 선택해 왔고, 한 해 집계에서는 이 비중이 전체 적립금의 88퍼센트에 달하기도 했다. 이런 쏠림을 개선하기 위해 2026년에는 고용노동부가 승인된 지 3년이 지난 디폴트옵션 상품을 대상으로 처음으로 수익률과 안정성을 평가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자료: 고용노동부 디폴트옵션 적립금·가입자 현황 및 2026년 상품 평가 관련 보도 종합
이런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면 방치적립금은 수년, 길게는 십수 년에 걸쳐 거의 이자가 붙지 않는 상태로 잠들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디폴트옵션은 가입자가 운용지시를 깜빡하거나 아예 신경 쓰지 않더라도, 방치적립금이 무이자나 다름없는 상태로 방치되는 최악의 상황만큼은 막아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 할 수 있다.
투자성향에 따라 갈리는 상품 선택
디폴트옵션 상품은 투자성향에 따라 안정형, 안정투자형, 중립투자형, 적극투자형이라는 네 단계로 나뉜다. 과거에는 초저위험,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위험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 때문에 가입자들이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에 따라 투자 중심의 명칭으로 바뀐 것이다.
실제 운용 성과를 보면 투자성향에 따른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 해의 공시 자료를 기준으로 네 개 등급의 수익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투자성향 등급 | 연 수익률 |
|---|---|
| 적극투자형(고위험) | 16.8% |
| 중립투자형(중위험) | 11.8% |
| 안정투자형(저위험) | 7.2% |
| 안정형(초저위험) | 3.3% |
자료: 고용노동부 사전지정운용제도 위험등급별 수익률 공시 자료 종합
이 수치는 그해의 시장 상황에 따른 결과이므로 매년 그대로 반복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등급 간의 수익률 격차가 결코 작지 않다는 점은 분명히 보여준다. 투자성향을 어떤 등급으로 설정했는지에 따라 같은 기간 손에 쥐는 결과가 이렇게까지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중립투자형이나 적극투자형으로 분류된 상품 가운데는 국내외 지수를 추종하는 펀드가 상당 부분 편입된 경우가 많다. 즉 아무 생각 없이 가장 안전해 보이는 안정형을 선택하면, 사실상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가까운 구조에 머물러 지수가 주는 성장의 기회를 처음부터 포기하는 셈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주변에는 이런 차이를 몸소 보여준 사례도 있다. 올해 말 퇴직을 앞둔 한 선배는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퇴직연금을 별다른 관심 없이 퇴직연금신탁으로 그대로 운용해 왔다. 이후 동료와 후배들의 권유로 연금펀드와 IRP 계좌로 전환한 뒤부터는 직접 운용지시를 내리기 시작했고, 미국 지수 투자에서 국내 지수 투자, 다시 국내 섹터 투자로 비중을 옮겨가며 여러 해에 걸쳐 수익을 쌓아갔다. 그 결과 퇴직을 앞둔 지금은 IRP 자산만 6억 원을 넘어섰으며, 그 선배는 만날 때마다 퇴직하기 전까지는 반드시 연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필자는 관련 업무를 통해 디폴트옵션이 처음 도입되던 시기에 회사 퇴직연금을 담당하는 실무자들과 적지 않게 마주한 적이 있다. 담당자 입장에서는 연금의 운용 성과가 자신의 성과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오히려 업무만 늘어나는 셈이어서, 디폴트옵션에 가입하더라도 가장 낮은 위험 등급을 선택하는 경우가 체감상 100건 중 99건에 가까웠다. 반면 자신의 노후자금으로 직접 연결되는 개인 가입자의 경우에는 중위험 등급을 선택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필자가 느낀 점은, 연금의 수익이 자신에게 얼마나 와닿는지가 디폴트옵션의 투자성향 등급을 무엇으로 선택할지를 가르는 핵심 변수라는 사실이다.
필자는 퇴직연금을 스스로 운용지시하며 주식과 채권, 금의 비중을 직접 조정해 왔기 때문에 디폴트옵션이 실제로 적용된 경험은 없다. 다만 그런 필자에게도, 투자지시를 직접 내리지 않으면 자신의 노후자금이 어떤 투자성향의 상품으로 자동 운용되는지조차 모른 채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은 새삼 크게 다가왔다.
결국 같은 디폴트옵션 제도 안에서도 투자성향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지수에 가까운 성장을 추구할 수도 있고 원리금 보장에만 머무를 수도 있다는 차이가 생긴다.
지정 이후에도 필요한 사후점검
디폴트옵션은 한 번 지정했다고 끝나는 절차가 아니다. 지정 이후에도 가입자는 언제든 다른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변경하거나, 직접 운용지시를 내리는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다. 제도 자체는 법적 의무사항이어서 지정을 취소할 수는 없지만, 그 안에서 어떤 상품을 선택할지는 계속해서 다시 점검하고 바꿀 수 있는 영역이다.
2026년에 처음 이루어진 정부의 디폴트옵션 상품 평가는 이런 사후점검의 필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승인 당시에는 문제가 없던 상품이라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수익률이나 안정성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나타날 수 있고, 정부는 이런 상품을 가려내 개선을 유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자료: 고용노동부 디폴트옵션 상품 평가 체계 도입 관련 보도 종합(2026년 기준)
필자의 생각으로는, 디폴트옵션은 방치라는 최악의 상황만 막아주는 최소한의 장치일 뿐, 그 장치가 자신에게 맞는 성장을 만들어주고 있는지는 가입자 스스로 주기적으로 사후점검을 해야 하는 몫으로 남는다. 지수 중심의 장기투자를 지향한다면, 디폴트옵션으로 자동 운용되는 자금이 실제로 지수에 가까운 상품에 담기고 있는지 한 번쯤 직접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디폴트옵션이 막아주는 방치적립금 문제, 투자성향에 따라 갈리는 상품 선택, 그리고 지정 이후에도 이어지는 사후점검은 서로 다른 단계가 아니라, 노후자금을 지수와 함께 키워가기 위해 순서대로 챙겨야 할 하나의 흐름이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경험과 판단, 그리고 고용노동부·금융감독원 등의 공시 자료를 참고한 정보성 글이며, 특정 상품이나 투자성향을 권유하는 투자 자문이 아니다. 제도와 공시 수치는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실제 지정 전에는 자신의 퇴직연금사업자를 통해 최신 정보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